‘보통’ 가족의 리얼리즘
이진실
2022년 부산비엔날레가 열린 부산현대미술관에서 한참 동안 걸음을 뗄 수 없는 작업이 있었다. 문지영의 <긴 밤을 보낸 언니에게>(2021)였다. 붉고 검푸른 색의 붓질들이 넘실거리는 캔버스 한 가운데 어린 두 자매가 작은 널판지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제 몸집보다 한참 큰 구명조끼를 입는 자매의 모습은 어린 시절 찍은 물놀이 사진에서 왔을 게 분명해 보이지만, 이들을 집어삼킬 듯한 강렬한 배경 때문에 정말 구조를 기다리는 소녀들 같다. 손을 꼭 잡고 있는 두 소녀의 표정과 태도는 완전 딴판이다. 위태롭지만 똑바로 선 채 얼어붙은 표정을 지닌 언니와 천진난만하게 고갯짓하며 웃고 있는 여동생. 내 시선이 한참 동안 꽂힌 곳은 언니의 얼굴이었는데, 그 표정에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뭔가 또 이미 다 안다는 듯한 태연함이 있었고, 동시에 그 못지 않은 묘한 불안과 공포가 어려 있다.
2014년 이래 문지영이 지속적으로 그려온 주요한 대상은 장애를 가진 동생과 엄마, 가족의 모습이다. 그녀는 자기 가족을 그린 이 그림들이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긴 밤을 보낸 언니에게>는 그녀의 가장 선명한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꼭 쥔 주먹, 꾹 다문 입, 동생과 맞잡은 손, 그리고 불안을 똑바로 응시하는 어린 자신의 얼굴을 작가는 과거에서 쏘아올린 어떤 예감처럼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 그림에서 작가가 보여주고픈 것은 위축되고 막막한 자신에게 오히려 웃음과 위로를 주는 해맑은 동생의 존재일 것이다. 장애인과 살아가는 비장애인 가족이라는 맥락이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나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내 가족의 실체를 마주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그닥 신나는 일이 아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가족은 자신의 구속, 치부, 심연과 마주하는 일에 가깝고 꽤나 징그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징그러운 일, 바깥 세계를 향한 시선을 돌려 가족을 마주하는 일이 그녀에게 그림의 소재로서가 아니라 작업을 지속해나가는 동력으로 작동한 것은 K장녀 특유의 책임감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론사 기자를 꿈꾸던 작가가 서른이 다 되어 부산에 내려와 미술을 시작할 당시 그녀의 머리와 가슴을 온통 장악하게 된 것은 장애를 가진 동생과 암투병 중인 엄마와 ‘살아가기’였으며, 이 ‘살아내기’는 그녀에게 필연적인 그림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지영의 그림에서 ‘장애’, ‘돌봄’, ‘가족’이라는 주제가 어떤 당위로서 가시화되거나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러한 가족의 경험과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자신에게 닥친 실존적 감각들을 화폭에 기록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18년부터 그려온 <엄마의 신전> 연작은 동생의 ‘치유’를 위해 엄마가 끊임없이 신앙에 매달렸던 추억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디로 이사를 가든” 불상, 정화수, 염주, 성모상, 끊임없이 차려지는 엄마의 신전, “절에서 시작해 절로 끝나는” 어린 시절 여행들, 굿이며 고사며 신당이며 엄마를 흔들어댄 그 “썩은 동아줄”의 음화된 기억들이 색동처럼 다채롭게 그려진다. 나뭇가지와 바람 사이로 흩어지는 가족사진 같은 <엄마의 신전X>(2021)이나 <반야용선>(2023)에 그려진 동생의 모습에서는 한결 따사롭고 밝은 빛이 자리한다. 마치 할머니와 엄마로 이어지는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돌봄과 기원이 바람, 불과 같은 생명력으로 이들을 감싸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인상적이라 할 붉은 법당과 신당의 모습(<엄마의 신전 II>(2018), <엄마의 신전 IX>(2021)에는 깊이 각인된 어린 시절의 공포뿐 아니라, 업보니 원한이니 하며 엄마와 가족들을 자책하게 만든 그 ‘신령함’에 대한 분노가 깃들어있는 것 같다. 문지영에게 이 그림들은 여전한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엄마의 고통과 속절없는 소망을 확인하는 일, 엄마를 연민하는 동시에 엄마와 비슷해지는 자신을 떼어놓고 마주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자책과 책임, 사랑과 원망을 함께 짊어지는 일, 서로 구속함으로써 같이 해방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문지영의 작업에는 <증명불가능의 얼굴>처럼 장애인에 대한 제도적 모순을 폭로하고 한국인들이 일생을 거치며 치르는 일련의 통과의례에 자리한 억압과 모순을 건드리는 작업도 있다. 하지만 매체의 차원에서 문지영의 회화에서 가장 주목할 수 있는 요소는 단연 장애와 질병을 지닌 여성의 신체성과 정동에 대한 표현이다. 누워서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언니는 작업중이야>(2020)이나 동생이 자신에게 볼을 부비는 모습(<언니가 좋아>(2015)), <너의 화장대>(2016)와 같은 작업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신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다. <엄마의 신전> 연작에서 등장하는 피사체의 거리감과 응시가 마치 타인의 시선이나 카메라와 같은 기계적 시선과 연루된 채, 시간적 거리두기와 회상의 감각을 구현한다면, 캔버스를 꽉 채우며 육박해오는 동생이나 엄마의 얼굴, 나신은 조금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관계, 부대끼는 관계 그 자체를 실감나게 담아낸다. 사랑과 부담, 행복과 책무가 끝없는 동전 던지기처럼 이어지는 삶, 포근하고 안락하지만 질식할 듯한 애착과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매순간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가족이라는 신체적 현실이 화폭 위에 진동한다. 작가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삼위일체>(2015)에서 부감샷으로 그려진 엄마, 동생, 본인의 얽힘은 이러한 현실 위에서 만들어지는 가장 사실적인 ‘성상’이 아닌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너무나 비가시적인 존재다. 차라리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추방된 존재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장애인권언론 <비마이너>의 한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언제까지 ‘불쌍한’ 장애인의 거룩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가족의 무한한 사랑은 역설적으로 사회에서 장애인을 포용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는 장애아동이 성장하며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잘 ‘극복’한 가족들은 희망의 메시지로 포장되어 전시된다. 그 이면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은 깨끗하게 편집된다.”* 문지영의 그림은 우리 사회에서 면죄부로 작동하고 있는 가족의 몫과 그 얼굴을 가시화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림에서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모계적, 여성적 관계가 지닌 삶의 에너지다. 그녀의 그림에서 우리는 장애인 가족의 기원(冀願)과 멍에와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우리를 더 진하게 물들이는 것은 어느 집에나 걸려 있는 가족사진과 같은, 불안과 행복이 공존하는 ‘보통’ 가족의 표정이다.
* 최한별, “장애자녀 부모의 두려움이 묻는다.‘나는 왜 죄인이 되었나’, 비마이너,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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