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물듦과 번짐

Review

by jiyoungmoon 2022. 10. 14. 05:48

본문

물듦과 번짐- 문지영론 (2021)

 

김대성, 문학평론가

 

문지영의 연작 <가장 보통의 존재>(2014~2015)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작품들이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담은 스냅 사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특별할 게 없는 시선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단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때론 막역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애가 있는 탓에 조금 뒤틀려 보이는 인물과 병으로 무너지고 있는 인물을 화폭 전면에 배치하고 있어서 관람객은 그들의 시선을 지근거리에서 감당해야 하지만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다보면 이상하리만치 가닿을 수 없는 막역한 거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가까워서 부대끼는 거리와 가닿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의 겹침은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가장 보통의 존재>는 장애를 가진 동생과 항암 치료를 하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작가의 사적인 이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작업이긴 하지만 이런 개인사적인 이력만으로 작품 전면에 흘러넘치는 생경한 물질성과 에너지까지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감 넘치는 인물의 모습은 생생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탓에 작가가 육친성보다 이물감을 강조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사람이 겹쳐 있거나 엉켜 있는 작품의 경우엔 관람객을 향해 육박해 들어오는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관람객이 작품과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건 작가가 피사체를 대상화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작품 앞에 서 있는 이를 휘감는 것처럼 느껴지는 에너지의 출처는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위치가 아프고 병든 그들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작가의 위치와 겹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는 것도 어려운 상태를 작가와 관람객은 공유하게 된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들러붙는 막중한 짐을 감내해온 작가는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고, 떨쳐낼 수도 없는 육친성의 책무를 ‘더미’의 형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 연작 중 두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가장 보통의 존재_162.2x130.3cm_ Oil on Canvas_2015) 아래에 누워 있는 엄마와 그 위에 포개져 있는 동생의 모습은 얼핏 ‘더미’처럼 보이지만 이쪽을 향해 있는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쉽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긴급하고 간절하게 희구하는 시선은 아니지만 그곳에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좁은 욕조에 꽉 들어차 있는 모습을 부감으로 구현한 작품(가장 보통의 존재_97x193.9cm_Oil on canvas_ 2014)과 마주하면 그 좁은 욕조 안에 휘말려 들어갈 것만 같다. 벌거벗은 두 여성의 육체는 그들의 밀착된 관계처럼 엉켜 있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시선은 우리를 이 좁은 욕조에서 꺼내달라거나 엉킨 몸을 풀어달라는 요청과는 다른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다만, 그 자리에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을 통해 문지영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취약한 개인이나 한 가족의 불행만이 아니다.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육체와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엔 불행에 휘말려 감당하기 벅찼던 부침의 시간과 그저 감내하며 그들 곁에 붙들려 있던 이력 또한 새겨져 있다. 한 가족의 불행이라고 여겨지는 탓에 외부를 향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앞에 서면 ‘이들’이 ‘우리’를 향해 여전히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보통의 존재>는 사회적 약자라고 칭할 뿐 정작 ‘사회적인 것’을 손쉽게 삭제해버리고 그 자리에 개인적인 불행을 기입해 그들을 사적인 영역에 감금해온 구조의 문제를 환기 한다. 이 연작에 무기력의 정서만이 아니라 분노나 원망의 정동(affect)이 함께 부대끼고 있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작업은 개인사적인 불행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애와 병듦, 노년, 취약한 여성의 삶, 자립할 수 없는 삶의 조건, 그리고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되어온 붕괴된 돌봄 체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의제 앞에 우리를 붙들어둔다. 그곳에 붙들림과 휘말림, 그리고 부대낌의 정서가 뒤엉켜 있다.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정서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엔 ‘붙드는 힘’과 ‘휘말리게 만드는 힘’이 함께 운동하고 있다.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시선에 붙들린다는 건 연루된다는 것이다. 그건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관계성’의 영역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자리에서 다음의 질문까지 덧붙여야겠다. 왜 어떤 경험은 미적 자질의 조건이 되지만, 어떤 경험은 사적인 경험으로 치부되는가? 작가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이력을 생생한 물질성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이물감으로 구현한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객관적인 거리두기’라는 미적 자질의 관성화된 승인 체계와 대상에 대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해온 ‘예술적 승화’라는 신화적 믿음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명불가능의 얼굴>(비디오, 2분18초, 2016)은 이러한 ‘예술(제도)의 필터링’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동생을 모델 삼아 여권 사진을 찍는 과정을 기록한 이 비디오 작업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드러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엔 제도적인 승인을 얻기 위한 규격화 절차의 폭력성과 허위성을 비판하는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기록한 후 이들의 얼굴을 후보정으로 작업하는 일련의 과정은 승인을 받기 위해선 인위적인 조작을 거쳐야만 한다는 역설을 드러내는데, 이는 비단 장애를 가진 이들이 겪고 있는 특수한 사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었던 예술의 관성화된 승인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제도의 승인을 받기 위해선 뒤틀리고 이물감이 느껴지는 불편한 ‘노이즈’를 지워야 한다. 

문지영이 가족을 매개로 그리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일 테다. 승인받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들, 그 곁에서 마모되는 애씀의 이력, 보이지 않지만 언제라도 삶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 과도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비이성적인 염원, 그리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생활 위에 켜켜이 쌓여간 서로를 향한 원망과 옅은 증오. 문지영은 가족이라는 익숙한 관계성 속에 자리한 재현될 수 없는 ‘노이즈’를 그려왔고 계속해서 그려갈 것이다. 그러니 문지영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노이즈’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지 감지하고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 중 동생의 얼굴 일부분이 지워져 있거나 의도적인 덧칠로 인해 경계가 희미해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너의 화장대>(2016)에서도 이런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유치원의 합동 생일잔치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ceremony Ⅱ>(2019)에선 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지워져 있고, <응급실>(2020)의 경우엔 인물의 얼굴이 덧칠되어 뭉개져 있다. 표현 방식이 비슷하다해도 각각의 상황과 내러티브가 다르기에 그 의도와 효과 또한 상이할 것이다. 신체의 물질성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데 집중했던 초기작과 달리 뭉개진 형상의 표출이 빈번해진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이 작가와 분리할 수 없는 ‘육친성’을 회화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그 존재를 현재화하는 데 몰두했다면 ‘뭉개진 형상’은 엉겨 붙어 있는 감정과 정서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워둔다는 점에서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지영이 구축해온 회화적 공간의 중심엔 육박해 들어오는 존재의 표정이 있었던 것과 달리 근래의 작업은 다소 다른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듯하다. 초기 회화의 중심축이 ‘신체의 물질성’이었다면 <엄마의 신전>(2018~2021) 연작의 중심축은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켜켜이 쌓여서 손쓸 수 없는 부대낌의 이력과 휘말림의 정동을 신체의 물질성을 통해 표현 했던 초기작을 염두에 둔다면 ‘기억’과 ‘시간’이라는 축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라기보단 기존의 논의가 심화·확장된 것이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회화의 중심축이 ‘시간’으로 옮겨갔기에 관람객들 또한 대상에 강렬하게 붙들리는 방식 아니라 다소간의 거리를 두고 작품이 구축한 공간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건 문지영의 작품 안에 관람객의 해석과 개입의 여지가 더 많이 마련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작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의 출처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엄마의 신전> 연작에선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인물의 형상이 축소되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 전면에 등장한다. 인물의 비중이 축소되었다는 건 작가와 대상의 거리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면적인 다른 관계성을 도입했다고 말할 순 없다. 문지영이 거리를 재는 단위는 손과 발이기 때문이다. 한 뼘, 한 발짝. 이 측량 방식은 충분히 매만진 것, 쓸고 닦았던 것, 들쳐 업었던 것, 가끔은 밀쳐냈던 것을 가늠하며, 멀리 가지 못하고 병실과 방문 앞을 초조하게 바장였던 걸음, 같은 자리에서 반복했던 삼천배와 같은 이력을 각인하는 역할을 한다. 거의 모든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뼘’과 ‘한 발짝’의 흔적은 문지영 작가의 인장(印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재현불가능한 노이즈의 형상을 추적하기 위해서라도 문지영의 회화 언어가 달라진 결정적인 국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행의 궤적을 살피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궤적을 설명할 수 있는 운동성은 ‘물듦’과 ‘번짐’일 것이다. 물듦은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의 개입과 침범을 의미한다. 선택불가능한 관계의 장력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닮아간다. 번진다는 것은 다른 곳으로 확장해간다는 것이다. <엄마의 신전> 연작 작업부터 이러한 번짐의 운동성이 더욱 부각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건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앞서 문지영의 근작엔 인물보다 배경이 전면에 도드라진다고 했었는데, 그 형상은 특정한 장소성을 구현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구축된다. 캔버스 전면을 장악한 붓질은 인과성을 드러내기보단 다종한 운동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근작인 <긴 밤을 보낸 언니에게>(2021)를 채우고 있는 붓질과 이를 통해 구축된 번짐의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어린 자매의 상이한 표정에서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 또한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유년 시절 이 두 자매의 기억 또한 서로 다를 것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자매의 표정은 상반되지만 꼭 잡고 있는 서로의 손만큼은 놓칠 거 같지 않아 조금은 안심이 된다. 하지만 이들은 고립되어 있다. 구조 요청조차 시도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 측은하거나 무기력하게 보이지 않은 건 번짐의 운동성으로 흘러넘치는 배경 때문일 것이다. 어둡고 무거운 필치는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위협처럼 느껴진다. 오랜 시간 이어지고 있는 불행의 연쇄와 운명처럼 들러붙어 있는 불우와 절망의 정조 사이에 이들이 내장하고 있는 열기와 열망이 비치기도 한다. 저마다의 선명한 색깔의 겹침 속에서 기이하고 방대하며 해독불가능한,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 다종한 힘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다. 아무도 설명해줄 수 없는 유년 시절의 불안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유독 배경을 채워간 붓질의 운동성이 도드라지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매번 다른 방식으로 붓질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긴 밤을 보낸 언니에게>의 회화적 중심축은 힘 있는 붓질의 생동감에 있다고 해야 한다. 서사의 축이 되는 인물의 비중은 낮아졌지만 마티에르의 두께나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을 회화적 언어로 활용하고 있는 근작에서 작가의 목소리와 시선이 더 깊어지고 명료해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거리를 두고 가족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려는 작가의 자리 잡기는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피사체와 거리를 둠으로써 밀착되어왔던 관계에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지영은 봉인된 시간과 응어리져 계류되었던 감정을 다시금 풀어가려고 한다. 이런 변화는 가족에 대한 시각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와 이어져 있다. 평생 한국전쟁기의 학살 경험과 가족의 모습을 이야기했던 소설가 박완서처럼 문지영 작업 속에도 언제나 가족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물듦과 번짐의 운동성을 바탕으로 다시금 펼쳐질 이 가족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 한 뼘과 한 발짝의 단위로 부단히 움직이고 옮겨온 이행의 행보가 제시할 세계가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끄러지고 붙들리는 그림  (0) 2022.10.14
텅 빈 눈빛을 그녀는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0) 2022.10.14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