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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고 붙들리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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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youngmoon 2022. 10. 14.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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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고 붙들리는 그림 (2020) 

 

안소현, 독립기획자 

 

문지영의 이미지들은 비탈에 서 있다. 그의 회화, 영상, 그리고 최근의 오브제 설치까지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보는 순간 우리를 어떤 감정으로 이끌고 가거나 어떤 잣대를 기준으로 우리의 시선을 구획하곤 한다.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물건과 종교적 장소의 알록달록한 풍경은 맹목적 믿음 속 애잔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동생의 얼굴에서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기준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작동시킨다. 다시 말해, 문지영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그냥 멈추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미끄러트린다. 그렇게 미끄러지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짊어진 여성이 기대는 믿음, 가족들의 몫으로 남겨진 장애,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견고해지는 정상성이라는 기준 등 사회 시스템의 빈틈에 주목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미끄러지기만 하는가? ‘올바른’ 감정과 사회적 문제의식으로 서둘러 감상을 마무리하게 되는가? 

사실 우리는 문지영의 이미지 자체, 특히 회화 이미지에 꽤나 오래 붙들려있다. 그것이 소위 ‘잘 그린’ 그림이기 때문인지, 분류된 감정으로 부르기 어려운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 때문인지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쩌면 그 ‘붙들림’에 작가가 지금 고심하고 있는 매체의 선택, 기법의 변화, 작업을 하는 태도에 대한 힌트가 있을 것 같아 그 안으로 좀 더 파고 들어 가 보기로 했다.

 

2016년 방정아 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작가는 가까운 관계의 인물들을 그리는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제가 깊숙이 관계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리는 과정은, 결국 그들의 이미지로 대체된 저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작업 대상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간명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도 하지만, 이 진술이 매우 ‘회화적’이어서 관심이 갔다. 엄마와 동생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사실 작가의, 작가가 읽어낸 감정일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렇게 작가가 확인한 스스로의 감정을 다시 읽으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아가 그 붓질에 담긴 긴장, 화면의 프레이밍이 부각시키는 덩어리감(<가장 보통의 존재>), 때로는 간단한 번짐의 표현에서조차 작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를 읽어낸다. 회화가 다른 어떤 매체와 장르보다 빼어난 부분, 회화에서 다른 매체로 대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회화 작업을 수행(修行)이라고 했다. 무엇을 그리든 ‘나’를 그렸으며, 작업의 과정은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는 과정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작가는 그 원리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제 작업의 경우 저와 긴밀하게 관계한 인물들을 그리다 보니, 작업 시간 동안 그 대상 혹은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몸짓과 붓질이라는 다소 기계적인 노동을 동반하면서, 생각의 회로를 끄고 켜는 일을 되풀이하다 보면, 처음 그 인물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나 태도가 정리되기도 합니다. 그림이 끝났을 때, 저는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과정 속에서 변화된 생각들이 더 소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의 결과물이 변태 후에 남겨진 허물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회화작업은, 그래서 일종의 수행 같습니다.”

생각의 회로를 끄고 켜는 일. 이 간단한 설명 하나만으로도 화면 위에 복잡한 회로도가 그려지며 작가가 설정한 에너지의 흐름을 찬찬히 따라가게 된다. 반복적인 붓질로 투여한 에너지가 인물을 읽는 작가의 생각의 방향을 정해주면, 보는 이는 거기서 생각이 변하고 감정들에 불이 켜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회화적 습관’ 때문인지 작가는 다른 매체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변화를 염두에 둔다. 영상 <증명 불가능의 얼굴>에서 규범의 그리드 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동생의 얼굴을 찍으면서 작가는 또 자신을 바라본다.

“동생의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제도의 모순점이 작업의 출발이었지만, 등장인물, 내용 모두 일차적으로 ‘집'을 벗어나 있었고요. 카메라의 시선이 저에게는 객관성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였고, 영상이라는 연속적인 화면들이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에게 영상은 집을 벗어나,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이것은 자신의 몸을 반복으로 변화시키는 수행(修行)에서부터 몸짓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수행(遂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그린 그림은 이미 사적 공간에 유폐된 존재들을 가시화하는 수행적 행위였다. 그리고 최근 작업 <ceremony I>, <결혼전야>, <엄마의 신전> 시리즈에서 나타나는 덜 묘사하기, 혹은 지우기는 가족 관계에서 나타나는 존재감의 편향을 ‘묘사’의 정도라는 몸짓으로 드러내는 퍼포먼스였다. 그 지우는 행위가 다소 날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보다 커진 수행성은 그의 작업에 숨어있던 의미층을 한 겹 끄집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문지영의 작업에서 이렇게 수행성이 커진 것은, 그것이 좋은 징후이건 아니건 간에, 어쩌면 작업에서 자신의 일신상의 변화를 감추지 않는 작가에겐 당연한 변화일 지도 모른다. 작가는 최근 결혼을 통해 자신의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환경, 노동, 감정의 급격한 변화는 당연히 문지영의 화면 어딘가에 강렬하게 드러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작가의 삶과 작업이 이 격변기를 지나면 어디를 향하게 될까.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삶에 영향을 받겠지만 작업의 차원에서 보면 기존 작업에서 드러난 약간 다른 방향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붉은 그림, <엄마의 신전 II>와 <너의 화장대>에서는 다른 작업에서 잘 보이지 않던 특징이 눈에 띈다. <엄마의 신전 II>의 배경에는 불상과 성물(聖物)들이 붉고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전경의 소녀가 입은 반바지의 알록달록한 패턴과 마치 한 면 위에 놓인 것 같다. 이 뜬금없는 반-주제적 독해는 최근의 실내외 풍경인 <엄마의 신전 IV>와 <엄마의 신전V>에서 먼저 시도해본 것이다. 문지영의 이전 작업에서 배경은 주로 비어 있는 단색조의 공간이었는데 최근에는 배경이 앞으로 튀어나와 전경의 사물들을 어지럽게 하고 섞이기 시작한다. <너의 화장대>에서 붉은 배경은 단색조에 가깝지만, 원근감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인물과 하나의 면 위에 착 붙어 있는 듯하다. 이렇게 배경의 밀도가 높아지고 튀어나오면서 얻게 되는 효과에는 대상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가 아니라 대상을 회화로 만들었다, 가 좀 더 어울린다. 과도한 존재감으로 내 삶을 침범했던 가족이 어느 순간 캔버스에 납작한 스티커처럼 붙여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정형화되지 않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정서들은 참으로 ‘회화적’이라고 느껴졌다. 언젠가 만남에서 내가 함부로 내뱉은 기름진 단어 “페인터리(painterly)”에 대해 작가가 제동을 건 적이 있다. “페인터리가 대체 뭘까요?” 나는 약간 창피해서 잘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며 넘어갔지만 규정 불가능한 그 상태, 규정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게 붙들어 놓는 그 상태가 페인터리하다고 뒤늦게 이 글에 쓴다. 그 안에서 대상은 연민, 가족, 여성, 사회적 책임, 정치적 올바름 같은 주제로 순식간에 미끄러지기보다는 여전히 이것은 ‘이미지’라는 단호한 선언이 되어 눈앞에 머무른다. 밀도 높은 배경은 대상을 꽉 차게 끌어안듯 우리의 시선을 휘감아 깍지를 끼고 화면 위에 머물게 한다. 그 이미지 안에서는 작가의 수행(修行)과 수행(遂行)이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을 회화적으로 만들려는 화가의 부지런한 붓질 역시 강렬한 퍼포먼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화를 요란하지 않게, 동시대적인 것이 되게 한다. 피켓을 든 동시대성은 아니지만, 고갈되지 않음을 고요히 증명하는 동시대성이다. 아감벤은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이 빛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문지영의 다소 고전적인 화면에서 쉽게 도달하지 않는 빛을 보는 것, 작가의 새로운 삶에서, 그 삶과 뗄 수 없는 작업에서 두근두근 기다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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