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로컬 미술’이 뜬다

Press

by jiyoungmoon 2020. 8. 3. 00:28

본문

2020.08.03 한겨레신문

 

‘로컬 미술’이 뜬다

변방 치부되던 지방전시 최근 기획력·콘텐츠 수준급

www.hani.co.kr

변방 치부되던 지방전시 최근 기획력·콘텐츠 수준급

지난 6~7월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특별전 ‘이것에 대하여’의 전시 광경. 국립현대미술관에 수집된 국외 작가들의 작품 컬렉션을 재구성해 한국 현대 미술사 내면의 취향과 흐름을 읽어내려 한 기획의도가 주목을 받았다.

 

변두리 미술? 이제 지방 미술을 한 수 아래로 낮춰 봤던 시대는 저물었다.흔히 ‘로컬’이라고 뭉뚱그려 칭했던 지방 미술판의 전시가 최근 전례 없이 약진하고 있다. 올 상반기 코로나19 사태로 수도권 국공립미술관이 장기 휴관하고, 서울 화랑가 전시가 주춤한 사이 도드라진 양상이다. 영호남과 충청권 미술관과 전시공간의 기획전·특별전이 수준도 높고 파격적인 콘텐츠로 승부를 걸면서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단순히 수도권 미술판의 공백을 업고 나타난 양상이 아니라 기획력과 콘텐츠 측면에서 수준급이란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변방으로 치부되던 지방의 전시가 글로벌 미술의 흐름, 지역 미술사의 맥락·특징에 바탕을 둔 개성적인 기획물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2020년 한국 미술판의 특징적인 현상을 만들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3층에 차려진 청년작가 기획전 ‘낯선 곳에 선’ 전시장. 출품작 중 일부인 문지영 작가의 그릇 설치 작품 <백개의 마음>이 그의 그림 연작 <엄마의 신전>을 배경으로 놓여 있다.

변화가 두드러진 곳이 예향 대구와 항도 부산이다. 대구미술관은 독일 라이프치히 화파의 세계적 대가인 팀 아이텔의 회화전을 성사시켜 주목을 받았다. 작가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4·5월 그린 신작까지 포함해 역대 최대 규모의 개인전을 만드는 기획 역량을 과시했다. 코로나19 사태의 가장 큰 피해 지역이란 점을 배경에 깔고 지역 중견 소장작가 12명이 참여한 ‘새로운 연대’전은 첨단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제작 기법이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대기오염 수치와 기상 상황을 실시간 디지털 화면에 반영하면서 대구의 환경 실태를 실감 나게 전한 김안나 작가의 설치 영상, 지인의 모습을 새긴 나무 조각상을 가득 도열시키며 팬데믹 시대 더욱 간절해진 사람에 대한 갈망을 표출한 김성수 작가의 작품 등이 눈에 띈다.

대구미술관의 기획전 ‘새로운 연대’에 나온 김성수 작가의 출품작 <사람을 만나다>. 코로나 확산 사태로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요즘 세태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전통 상여의 꼭두 장식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가는 친근한 주변 지인들의 모습을 새긴 나무 조각상을 가득 도열시켜 사람, 삶에 대한 핍진한 애정을 표출한다.

 

아시아 미술 시장의 허브로서 가능성이 주목됐던 부산도 파격적이면서도 질 높은 전시기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지난 3~6월 원로작가 김종학의 대형 개인전에서 그의 초창기 추상 및 표현주의 성향 작품을 대거 발굴해 꽃 그림 작가에 머물러 있던 작품 서사를 대폭 확장하는 성과를 이뤘다. 또 부산 지역 1960~70년대 실험미술 전시인 ‘끝이 없는 시작’(9월8일까지)을 기획해 60~70년대 부산의 단색조 회화와 오브제 회화 등을 다수 발굴했다. 지난달 17일부터는 현지 소장작가들의 전시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0―낯선 곳에 선’(10월4일까지)을 시작했다. 장애인 가족을 둔 가족사를 결핍된 듯한 화면과 정안수 그릇 설치 작업으로 표현한 문지영 작가, 추억이 어린 공간을 철골조에 매달린 극사실화 분위기의 사진 캔버스로 표현한 권하형 작가 등이 눈길을 끈다. 

부산 해운대에 최근 문을 연 영무파라드호텔은 내부 공간의 상당 부분을 낙서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내주는 아트 프로젝트를 내보였다. 12~15층 객실들을 마주 보는 개방 공간의 높은 벽에 재미 그라피티 작가 심찬양의 거대한 작품 <워크 인 유어 슈>가 그려졌다.

 

또 하나의 주목거리는 민간 컬렉터의 선구적인 아트 프로젝트다. 해운대에 최근 개장한 영무파라드호텔은 아트호텔을 표방하면서 공간 일부를 낙서 예술가에게 내주었다. 12~15층 객실 맞은편 벽에 재미 그라피티 작가 심찬양이 색동옷을 입은 흑인 소녀를 그린 <워크 인 유어 슈>(Walk in your shoe)를 배치하고, 구헌주·임동주의 벽화나 손봉채의 키네틱 자전거 등을 객실과 어울리는 공공예술로 선보였다. 이 밖에 대전시립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서 국외 작가의 수집품만 집중 발굴한 기획전 ‘이것에 대하여’를 지난 6~7월 선보여 “전시 구성이 서구미술관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지방 미술판의 약진은 지난해부터 현장에서 활약했던 전문 큐레이터들이 지역 미술관의 사령탑으로 취임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더불어 세계 미술의 조류를 실시간으로 흡수해온 지역 작가들의 숨은 내공 역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이유가 됐다.신정훈 서울대 미대 교수가 지난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부산 미술 다시 보기’ 세미나에서 내놓은 발언을 곱씹어볼 만하다. “미술판에서 지역과 중앙의 경계를 따지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역 미술사에 얽힌 사실을 계속 찾아내면서 끊임없이 논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